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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바위 성지

月靜의 흔적 2014. 11. 18. 06:34

 

비가 올듯 날이 흐리다... 전주 출장 다녀 오는 길에 나바위 성지가 생각 나 핸들을 돌려 성지로 향한다.

논산-천안간 민자고속도로를 타고 강경읍을 지나 23번 국도 익산방향으로 약 2Km를 가면 오른편으로

야트막한 화산(華山) 중턱에 앉은 성당 하나... 바로 화산성당이다.


입구에서 망원렌즈로 잡은 고색창연한 화산성당


계단을 올라서면 본당의 자태가 들어난다.
한옥에 뾰족탑을 올려 세운 외양이 언뜻 보기에도 여느 성당과는 사뭇 다른 성당. 개화기에 세워져 100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옛 모습 그대로인 천주교의 유일한 한옥성당인 나바위 성당.

(전북 익산시 망성면 화산리 1158·사적 제318호)이다. 외래종교의 토착화를 보여주는 희귀한 교회란 점에 더해

한국 최초의 사제인 김대건 신부가 중국에서 사제 서품을 받고 한국 땅에 첫 발을 내디딘 유서깊은 곳.

한국 천주교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성지로 순례객들의 발길이 끊임없이 이어진다.


우암 송시열이 산세에 반해 ‘아름다운 산’이란 이름을 붙였다는 화산(華山).
나바위성당은 이 화산에 있는 광장처럼 너른 바위(나바위)에서 이름을 땄다고 한다.
본당 설립 때는 ‘화산본당’이라 불렸지만 성당이 건립되고 성지로 조성되면서 지금의 나바위로 바뀌었다.
중국 상하이 김가항성당에서 사제 서품을 받은 김대건 신부는 돛단배인 라파엘호에 몸을 싣고
서울로 향하던 중 풍랑을 만나 제주도 용수리 포구까지 밀려갔다고 한다.
우여곡절 끝에 서울로올라오던 중 배에 물이 차오르는 위험한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배를
댄 곳이 바로 강경 황산포구에서 조금 떨어진 화산이다.
당시 라파엘호에는 조선교구 제3대 교구장 페레올 주교와파리외방전교회 소속 다블뤼 신부,
그리고 김 신부 사제서품식에 참석했던 조선 신자 11명이함께 타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 제물포, 부산과 함께 3대 어시장으로 꼽혔던 황산포구는 매일 100여척의 배가 드나들
만큼 번창했던 곳이라 포졸들이 항상 진을 치고 있었다. 포졸들의 눈을 피해 인근 화산에
상륙한김 신부와 신자들은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에게 상복을 입혀 상주로 변장시킨 후 신자 집에서

하룻밤을 보낸 뒤 상경했다. (김대건 신부는 상경 11개월 후인 1846년 9월 새남터 에서 참수되어 순교했다.)

김대건 신부가 한국 땅을 밟은 것을 기념해 조선교구장 뮈텔 주교가 1897년 이곳에 설립한
것이바로 ‘화산본당’. 호남권 본당으로선 전동·수류·고산성당에 이어 네번째로 설립됐지만
옛 모습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성당 중 가장 오래된 것이다.
초대 주임으로 파견된 파리외방전교회소속 베르모렐 신부가 당시 돈 4000원을 주고 화산과
농경지를 사들여 1906년에 성당 건물을세웠다. 설계는 서울의 약현성당(현 중림동성당)을
설계했던 프와넬 신부가 맡았고 벽돌공과목공일은 모두 중국인들이 했다.
화산에서 30리 떨어진 임천군 지저동 뒷산에서 베어낸 소나무들을 뗏목으로 날라 건축 목재로
썼는데, 터 다지기며 목재 운반 같은 힘겨운 일은 모두 조선 신자들의 몫이었다고 한다.

처음 지어졌을 때의 성당은 흙벽, 기와지붕에 나무로 만든 종탑과 마루바닥의 순 한옥 목조
건물. 종탑에는 프랑스에서 제작해 들여온 종이 설치됐는데 이 종은 나중에 성당 입구쪽 강당에
종탑을 새로 들여 옮겼다. 종 소리의 울림에 건물 균형이 틀어지는데다 종탑이 벼락을 맞아
어쩔 수 없이 종을 옮겼다고 한다. 이후 1916년에 목조벽을 벽돌조로 교체하고 고딕식 벽돌
종각을 올려 지금의 한국식과 서양식 건축양식이 혼합된 독특한 형태를 갖추게 된 것이다.
성당 앞면의 수직종탑과 아치형 출입구는 흔히 볼 수 있는 것이지만 전통 목조 한옥 형태의
지붕과 벽면은 성당의 것으론 아주 생소하다. 기와 지붕 아래에는 중국 인부들의 손길을 탄
팔각 채광창 68개가 사방으로 나 있고, 모든 처마 위엔 십자가가 세워져 있다.

 
 
 
 
 


거대한 팽나무 앞에는 피에타상이 있다.

 
 

 

나바위 성지의 안내도

 

나바위 성지 즉, 화산성당의 소개 글

 
 


기와 지붕을 인 목조 한옥에 치켜세운 고딕 종탑의 본당과 바로 이웃한 사제관이 연출하는 조경이 잘 꾸며진 정원

못지않게 빼어나다 


성당 양쪽 벽 바깥에 회랑을 두른 것도 이 성당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양식이다. 

 
 
 
 


김대건 신부 순교 기념비는 1952년부터 2년간 당시 주임 김후상 신부와 신자들이 모금한 60만환으로 후임 김재덕 신부

(훗날 5대 전주교구장 주교를 지냄)가 1955년 건립했다. 


성당 뒷편에는 야외 제대와 '평화의 모후' 성모 동산이 꾸며져 있고, 화산 정상까지 '십자가의 길'이 조성돼 있다.

이 십자가의 길을 따라 화산 정상에 오르면 '김대건 신부 순교 기념비'와 '망금정'이 있다. 


십자가의 길 입구 


십자가의 길은 약간의 언덕길이다. 


십자가의 길 제1처 

 
 
 
 
 
 
 
 
 
 
 
 
 
 
 
 
 
 
 
 
 
 
 
 


소세딕 신부 묘 


김대건 신부 순교기념비는 김 신부가 타고 왔던 라파엘호의 규모와 같은, 높이 4m50㎝의 크기 로 지어졌다. 


순교 기념비 왼쪽으로 금강 황산포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망금정’은 대구대교구 초대 교구장 드망즈 주교와

교구 사제 피정소로 사용되던 곳. 망금정 바로 아래까지 금강 강물이 넘실거렸지만 일본인들이 둑을 쌓아

농토로 만들었고 지금은 주민들이 수박, 토마토를 키우는 비닐하우스 단지로 변했다. 

 
 


저 멀리 만경평야가 보이고 기차가 한가로이 들판을 가로지른다. 

 
 
 
 
 
 
 
 


화산성당의 뒷 모습


전라북도와 충청남도 서북지방의 공소 24개를 관할하며 1929년 무렵엔 신자수 3200명에 전국 최대의 본당으로 우뚝 섰던

나바위성당. 전국에서 최초로 신사참배 거부 사태를 일으킨 ‘계명학교’를 운영한 바로 그 성당이며 일제기와 6·25전쟁

중에도 미사가 끊이지 않고 이어졌던 유일한 성당이기도 하다. 지금은 신자 800명이 교적에 올라있고 망성면 지역 주민

180명 정도가 미사에 참여하는 작은 교회. 그러나 성당 입구에 그대로 남아 있는 이름 ‘화산성당’이 한때 ‘전국 최대의

본당’이었던 옛 위상을 웅변하고 있다. 


처음 지어졌을 때의 성당은 흙벽, 기와지붕에 나무로 만든 종탑과 마루바닥의 순 한옥 목조 건물. 종탑에는 프랑스에서

제작해 들여온 종이 설치됐는데 이 종은 나중에 성당 입구쪽 강당에 종탑을 새로 들여 옮겼다. 종 소리의 울림에 건물

균형이 틀어지는데다 종탑에 벼락을 맞아 어쩔 수 없이 종을 옮겼다고 한다. 이후 1916년에 목조벽을 벽돌조로 교체하고

고딕식 벽돌 종각을 올려 지금의 한국식과 서양식 건축양식이 혼합된 독특한 형태를 갖추게 된 것이다.

성당 앞면의 수직종탑과 아치형 출입구는 흔히 볼 수 있는 것이지만 전통 목조 한옥 형태의 지붕과 벽면은 성당의 것으론

아주 생소하다. 기와 지붕 아래에는 중국 인부들의 손길을 탄 팔각 채광창 68개가 사방으로 나 있고,

모든 처마 위엔 십자가가 세워져 있다 

 
 


왼편이 성당이고 오른편이 사제관이다. 

 
 
 
 
 
 


성당 외벽 양쪽 공간에 마련된 회랑. 내부가 아닌 외부에 회랑을 설치한 성당은 이곳이 유일하다. 


유일한 ‘한옥 천주교성당’에 걸맞게 내부 구조와 제대 등 성물들은 모두 현대 건축양식의 성당에선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것들이다. 우선 성당의 가장 성스럽고 중요한 공간인 제단과 제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전례 개혁 이전의 모든 성당이 그랬듯이 사제가 신자석에 등을 돌린 채 벽을 보고 미사를 봉헌하던

옛 제대가 그대로 보존돼 있다. 초대 주임이었던 베르모렐 신부가 프랑스와 중국에서 부품을 몰래 들여와 직접 조립했다

고 한다. 제대 위 예수 성심상과 촛대, 감실 등도 성당을 처음 지었을 때 들여왔던 그대로다. 중앙 제대 양 옆에는

소제대가 옛 모습대로 자리를 지키고 있는데 오른쪽 소제대 감실에는 김대건 신부의 유해 일부(목뼈)가 봉안되어 있어

신자들의 예배가 집중된다. 옛 제대 앞 신자석 쪽을 향해 새로 제대를 놓아 모두 4대의 제대를 갖추고 있는 셈이다.

기록으로 보면 제단과 신자석 사이를 구분하는 성체간이 있었지만 언제 철거되어 어디에 보관되어 있는지 알 수 없다.

중앙 통로 한가운데에는 8개의 목조 기둥이 일정 간격으로 서 있는데 이 기둥들은 남녀 신자석을 구분하는 경계였다고

한다. 많은 초창기 교회와 성당에서 천 등으로 칸막이를 쳤지만 아예 기둥을 세워 남녀석을 구분한 것은 이례적이다.

출입문을 들어서자마자 눈에 띄는 초창기 그대로의 낡은 목조 성수대도 독특하다. 바닥은 맨 마루바닥.

처음 지어졌을 당시에 깔았던 나무 그대로의 것인데 오랜 세월 신자들이 드나들어 반질반질하다. 

 
 
 
 


성당 제단 중앙에 보존되어 있는 제대. 사제가 신자쪽에 등을 돌린 채 미사를 봉헌하던 옛 의식을 알려준다. 

 
 
 
 


옛 제대 바로 앞 새 제대 밑에는 1995년에 전주교구청에서 옮겨온 김대건 신부 성해 일부가 안치돼 있다. 


화선지로 그려진 창문이 그 어느 모자이크 보다도 정감있고 부드럽다. 

 
 
 
 
 
 
 
 
 
 


성당 벽 윗부분에 사방으로 낸 중국식 8각창. 중국 인부들의 흔적을 볼 수 있는 부분이다. 

 
 
 
 


사제관 

 
 


피정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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