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남자의 일상
남한산성 순교성지 본문
"신유, 기해, 병인박해를 통해 300여 인(人)의 순교자가 탄생한 남한산성은 한강이남
경기지역의 교우들에게는 잊을 수 없는 순교 터이다."
남한산성 순교성지 홈페이지 소개란 첫 글귀이다.
관방의 요지며, 보장처로서 주목되어 산성이 축조되고, 행정치소가 산성 안에 마련되고, 나아가
광주유수가 임명된 남한산성이 천주교와 관련을 맺고 순교성지로 바뀌게 된 이유는 광주부윤이
토포사를 겸하면서 이곳이 바로 형장의 장소가 되었기 때문이다.
남한산성의 토포사는 광주 고을의 치안을 맡으면서 동쪽으로는 양근의 용진, 서쪽으로는 안산의
성곶이, 북쪽으로는 한강, 남쪽으로는 이천, 여주, 양지, 용인에 이르는 고을 안에서 강도나
역도들을 섬멸하는 역할을 하였는데, 천주교 박해령이 내려지면 토포군관들은 위의 지역으로
나가 천주교 교우들을 잡았던 것이다.
광주 토포사가 관할 광주에는 1784년 공식적으로 교회가 이 땅에 출범하기에 앞서 천주 신앙에
관심 있는 학자들이 모였던 천지암을 비롯해 교회가 창설되면서 신앙 운동이 우선적으로 전개
되었던 곳이다. 교회의 선구자 이벽(李檗)으로부터 세례를 받고 신앙운동에 나선 권일신(權日身)은
광주, 양근 일대에 신앙공동체를 조성하였고, 정약종과 정약용은 마재에 공동체를 조성하였는데
이같은 공동체는 박해에 따라 토포사의 표적이 되었다.
교인들을 사학죄인으로 치죄한 최초의 광주 토포사, 즉 광주부윤은 이가환(李家煥)이다.
이가환은 실학자 성호 이익(星湖 李瀷)의 종손이며, 최초의 영세자 이승훈(李承薰)의 숙부로서,
그 자신이 1801년 신유박해 때 천주교 신자로 지목되어 죽음을 당한 순교자이다. 그러나 한때는
박해에도 앞장섰는데 1791년(정조5년) 광주부윤으로 임명되어 조정의 뜻을 지키고자 각 면리에
이단 배척의 뜻을 명령하고, 장시에 방을 붙여서 널리 사학을 금지하였다. 그리고 수배를 통해
천주교 신자 4~5명을 체포하였는데 이들에게 곤장을 쳐서 신문하고, 결국 마음을 바꾸겠다는
다짐을 받고 풀어 주었다고 스스로 밝혔다.
그 후 1801년(순조1년) 신유박해 때에 광주 의일리(현 의왕시)에 살던 한덕운(韓德運) 토마스가
체포되어 1801년 12월 28일(음력) 동문 밖에서 처형되면서 천주교 신앙의 잊을 수 없는 순교지가
되었다. 그리고 1839년 기해박해에는 새로운 교우촌으로 성장한 구산의 김만집(金萬集),
김문집(金文集), 김주집(金?集)과 그의 아들들이 체포되었고, 1866년 병인박해 때에는
구산의 김성희(金聖熙), 김차의(金次熙), 김경희(金敬熙), 김윤희(金允熙), 최지현(崔址鉉),
심칠여(沁七汝)와 서문 밖의 홍희만(洪喜萬), 홍학주(洪鶴周), 이천 단대의 정은(鄭?) 등
40여 명의 교우들이 체포되어 온갖 고문을 받으며 끝내 신앙을 증거 하다가 순교하였다.
[출처 : 남한산성 순교성지 홈페이지]
남한산성 로터리 오른편에 위치한 순교성지.
2004년 세워진 순교자 현양비
입구 왼편에는 성모 마리아 상과 촛불봉헌대가 있다.
야외 미사터에 모셔져 있는 십자가
오른쪽으로 십자가의 길이 시작된다. 여늬 성지와는 달리 소박한 십자가의 길...
오른쪽 아래로 내려서면 야외 미사터의 왼쪽에 모셔져 있는 마리아상을 만날 수 있다.
다시 내려서면 시원한 약수가 항상 그 물을 흘리고...
소성당 : 성체가 현시되어 있으며 김성우 안토니오, 최경환 프란치스코 두 분의 성인의 유해가
모셔져 있다.
전통적 이미지의 성요셉, 성마리아, 아기예수님으로 꾸며져 있는 구유
등산객들이나 신자들이 아주 쉽고 편한 마음으로 다가 설 수 있는 곳입니다...
1995년 윤민구 신부님의 현양대회로 시작된 이곳은 먹거리 장소로 변해버린 남한산성의
한켠에서 묵묵히 옛 순교자들을 기리고 있는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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